- 제1장 역발상의 미학
물처럼 사는 인생이 가장 아름답다 - 상선약수(上善若水)
맛있는 음식은 입을 상하게 한다 - 오미구상(五味口爽)
도와주는 것이 해가 될 수 있다 - 발묘조장(拔苗助長)
거꾸로 가는 것이 정답이다 -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계곡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다 - 곡신불사(谷神不死)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기는 힘들다 - 난득호도(難得糊塗)
편안함을 추구하면 몸이 나빠진다 - 섭생(攝生)
당신 마음이 내 마음입니다 - 성인무상심(聖人無常心)
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몰린다 - 다언삭궁(多言數窮)
바람은 마음을 부러워한다 - 풍연심(風憐心)
똑똑한 상인은 좋은 물건을 내놓지 않는다 - 심장약허(深藏若虛)
작은 생선은 자주 뒤집으면 먹을 게 없다 - 약팽소선(若烹小鮮)
날마다 비우는 것이 도를 닦는 방법이다 - 위도일손(爲道日損)
잘 쓰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 이용(利用)
뒤로 가는 것이 앞으로 가는 것이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사랑이란 이름으로 간섭하지 말라! - 천지불인(天地不仁)
칭찬받는 사람이 위험하다! - 태상유지(太上有之)
큰일은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 필작어세(必作於細)
하류(下流)가 정답이다 - 대국자하류(大國者下流)
용의 눈물 - 항룡유회(亢龍有悔)
혼돈이 질서보다 아름다운 이유 - 혼돈(混沌)
광채를 줄이고 세상의 눈높이에 맞춰라! - 화광동진(和光同塵)
최고의 싸움닭은 목계 - 목계지덕(木鷄之德)
제2장 마음경영
좋은 이웃이 프리미엄 - 천만매린(千萬買隣)
우산(牛山)은 원래 민둥산이 아니었다 - 우산지목(牛山之木)
분노를 옮기지 마라 - 불천노(不遷怒)
지극한 정성은 쉬지 않는다 - 지성무식(至誠無息)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 순망치한(脣亡齒寒)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 - 불인지심(不忍之心)
버럭쟁이가 되면 천하를 잃는다 - 폭노위계(暴怒爲戒)
먹을 것이 있어야 윤리 도덕이 나온다 - 항산항심(恒産恒心)
영웅은 울 때를 안다 - 영웅선읍(英雄善泣)
옳음을 추구하면 호연지기가 생겨난다 - 호연지기(浩然之氣)
마음을 재계하여 평형을 유지하라! - 심재(心齋)
유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 종신지우(終身之憂)
신뢰가 없으면 존립 기반이 없다 - 무신불립(無信不立)
실크로드로 가는 술 익는 마을 - 주천(酒泉)
아침에 도를 들으면? -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뭉치면 산다 - 천시불여인화(天時不如人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맹자의 행복한 인생론 - 인생삼락(人生三樂)
어진 사람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 - 인자무적(仁者無敵)
법보다 위대한 것이 덕이다 - 위정이덕(爲政以德)
불혹의 나이 40대 - 부동심(不動心)
어느 시인의 작은 행복 -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 - 어부사(漁父辭)
제3장 변화와 혁신
영원한 승리는 없다 - 전승불복(戰勝不復)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 덕미이위존(德微而位尊)
술집에 손님이 없는 이유 - 맹구지환(猛狗之患)
황하의 신(神) 하백(河伯)의 깨달음 - 정저지와(井底之蛙)
손 안 트는 약을 팔아 장군이 된 사나이 - 불균수지약(不龜手之藥)
태산은 한 줌의 흙을 사양하지 않는다 - 태산불사토양(泰山不辭土壤)
수영 잘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다 - 선유자익(善游者溺)
작은 뱀을 태우고 행군하라! - 학택지사(?澤之蛇)
새로운 토끼를 잡으려면 새로운 먹이를 준비하라! - 수주대토(守株待兎)
큰 그릇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 대기만성(大器晩成)
작은 것을 섬기는 것은 어진 자의 행동이다 - 사소주의(事小主義)
상하가 서로 낮추면 태평성대가 된다 - 지천태(地天泰)
종횡무진, 생존만이 관건이다 - 합종연횡(合縱連衡)
저녁에는 집에 가고 싶다 - 모기귀(暮氣歸)
세 번 변하는 사람이 진정한 군자 - 군자삼변(君子三變)
호랑이의 눈으로 먹잇감을 바라보라! - 호시탐탐(虎視耽耽)
군자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군자불기(君子不器)
사냥에도 원칙이 있다 - 왕기미유능직인(枉己未有能直人)
오십 보나 백 보나 도망간 것은 같다 -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서시 따라 하다 추녀가 된 동시 - 동시효빈(東施效嚬)
똑똑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가지고 있다 - 교토삼굴(狡兎三窟)
모자 담당 관리의 월권 - 월관지화(越官之禍)
못된 옛날 습관을 혁파하라! - 혁구습(革舊習)
제4장 역경이 경쟁력이다
궁(窮)하면 통(通)하리라! - 궁즉통(窮則通)
아프더라도 살을 도려내라! - 고육계(苦肉計)
남의 시신을 빌려 다시 살아나라! - 차시환혼(借屍還魂)
위기를 보면 목숨을 걸고 행동하라! - 견위수명(見危授命)
군자는 물러나고 소인만 득실하다! - 천지비(天地否)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 - 무중생유(無中生有)
좋은 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 절차탁마(切磋琢磨)
하늘의 운행은 쉬지 않는다 - 자강불식(自强不息)
금빛 매미는 허물을 벗어야 만들어진다 - 금선탈각(金蟬脫殼)
하루에 세 가지 자신을 반성한다 - 오일삼성(吾日三省)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희생하다 - 이대도강(李代桃R)
쓰는(用) 것이 경쟁력이다 - 무지이위용(無之以爲用)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라! - 독립불구(獨立不懼)
남의 잘못을 꾸짖는 마음 - 책인지심(責人之心)
말은 어눌하고 행동은 민첩하라! - 눌언민행(訥言敏行)
인생의 세 가지 불행 -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
물을 흐리게 만들어 고기를 잡는다 - 혼수모어(混水摸魚)
지붕으로 유인하여 사다리를 치워라! - 상옥추제(上屋抽梯)
나무 위에 화려한 꽃을 피게 하라! - 수상개화(樹上開花)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 반객위주(反客爲主)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 주위상(走爲上)
최고의 백정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 포정해우(?丁解牛)
인재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 일목삼착(一沐三捉)
제5장 전략으로 승부한다
상대방이 의도하지 못한 시간에 나가라! - 출기불의(出其不意)
전쟁은 승리를 확인하러 들어가는 것이다 - 선승구전(先勝求戰)
죽기만을 각오하면 죽는다 - 필사가살(必死可殺)
남의 칼을 빌려 상대방을 쳐라! - 차도살인(借刀殺人)
삼(三)과 사(四)의 합(合)은 칠(七) - 조삼모사(朝三暮四)
두꺼운 얼굴과 검은 마음으로 성공하라! - 후안흑심(厚顔黑心)
이길 계산 5가지 법칙 -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
주도권을 쥐려면 이익을 주어라! - 적인자지리지(敵人自至利之)
공격을 결정함에 명예를 구하지 마라! - 진불구명(進不求名)
위기가 아니면 싸우지 마라! - 비위부전(非危不戰)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 진화타겁(?火打劫)
잡으려면 먼저 놓아줘라! - 욕금고종(欲擒姑縱)
전쟁은 속이는 게임이다 - 병자궤도야(兵者詭道也)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길러라! - 도광양회(韜光養晦)
쓸모없는 것이 가장 쓸모 있는 것이다! - 무용지유용(無用之有用)
미녀를 이용하라! - 미인계(美人計)
돌아가는 것이 곧장 가는 것보다 빠르리라! - 우직지계(迂直之計)
소리는 동쪽에 지르고 서쪽을 공격하라! - 성동격서(聲東擊西)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다 - 화호화구(畵虎畵狗)
공격해서는 안 될 곳이 있다 - 군유소불격(軍有所不擊)
승리를 위한 7가지 분석 - 칠계(七計)
임금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다 - 군령유소불수(君令有所不受)
어리석은 척하되 미치지는 마라! - 가치부전(假痴不癲)
- 2011/07/0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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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1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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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고 춤추는 약대동 사람들 | ||||||||||||||||||||||||||||||||||||||||||||||||||
| 지역사회 섬기는 새롬교회 발자취 담은 책 출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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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원미구 약대동은 새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이곳은 오래된 주택들이 한 단지를 이루고, 건너편에서는 주상 복합 아파트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6월 12일, 낡은 주택 건물들 사이에 있는 새롬교회(이원돈 목사)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날, 새롬교회 예배당에서 이원돈 목사가 쓴 <마을이 꿈을 꾸면 도시가 춤을 춘다>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 가정지원센터는 약대동의 혼자 사는 노인을 대상으로 도시락을 배달한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실천 방안으로 새롬교회는 어린이집, 가정지원센터, 공부방, 도서관, 인문학 카페 등을 설립하고 지원한다. 그중 약대주민자치센터에 위치한 신나는가족도서관은 1만 2,000여 권의 책을 보유했으며, 독서 교실, 마을 학교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단지 새롬교회의 사역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필요에 부합하기 위해 시작된 것들이다.
20여 년간 새롬교회에 출석한 김귀숙(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 씨는 지나갔던 일이 책으로 발간되니 '주마등처럼 지난 일이 머릿속을 지나갔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성재(수요인문학카페 총무) 씨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예로 들며, 약대동 지역의 소시민들이 대안 경제, 사회적 기업을 토론하고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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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2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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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Alan J. Roxburgh
Introduction
주 안에서 벗이 된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제 마음 속에 있는 주제에 대해서 전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이 주제는 지난 25년 간 제 학문과 사역의 중심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언어의 차이 때문에 생길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을 참아주실 것에 대해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 짐작에 여러분 중 많은 분이 영어를 아실 테지만, 저는 한국어를 전혀 못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을 모른다는 말이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이 제 말을 받아들이게 될 때에 여러분에게 저는 아웃사이더이며, ‘가르치는 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배우는 자’로서 여기에 함께 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너그러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은 다 여러분 덕입니다. 저는 지난 25년 동안 도시와 교외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목회를 해왔던 목사였으므로,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우리 앞에 놓여진 목회사역의 도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북미주에서의 경험을 살려 여러분들의 경험과 상황으로 유용하게 옮겨보려고 합니다.
저는 전후 영국에서, 더 정확히는 리버풀Liverpool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항구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집중적으로 폭격을 당했습니다. 제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는 폭격을 맞은 건물들 가운데서, 그리고 해변과 벌판에 우뚝 솟은 콘크리트 방호 포대 위로 뛰어다니면서 놀았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 당시 이것이 자연적이지 않은 일이였다거나 제가 제 부모님들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가운데로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첫 포스트모던 세대가 폭격으로 폐허화되었던 전후 유럽의 폐허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썼습니다. 이것이 제가 물려받은 유산입니다. 또한 그것은 세속적인 가정교육이기도 했습니다. 제 부모님들은 교회에 대해 거의 신뢰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생활에 대해 전혀 실질적인 경험이 없었던 노동 계급, 블루 컬러의 일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50대였던 제 부모님이 죽어가고 있었던 공업 항구도시의 황량함을 탈출하여 자기 자녀들에게 신선한 기회를 주기 위해 캐나다로 이민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제 십대 시절에 캐나다는 제 고향이 되었습니다. 제게 있어 캐나다는 고향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그렇게 중간에 끼어있는 어중간한 나라였습니다. 미국보다는 훨씬 더 유럽적이며 영국적입니다만, 여전히 그 국경은 미국의 국경에 따라 붙어 있습니다. 캐나다는 다문화적이며 다인종적인 나라이며, 그 국민의 18퍼센트는 전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여러 종교가 있으며 세속적 성격이 다분한 나라입니다. 바로 그 캐나다에서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1970년대에 제가 목회자가 되었을 때, 저희 세대 대다수는 기독교 스토리를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떠나버렸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떤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다른 교회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서구 문화권에 대한 선교사적 참여missionary engagement의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확신하건대, 이것은 오늘날의 목회적 과제입니다. 캐나다의 많은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찾아오고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훈련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교회의 인상을 좋게 가지게 하여 사람들이 더 좋은 찬양이나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더 나은 설교가 있는 다른 교회로 슬쩍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돌리는데 미친 듯이 진력하고 있습니다.
8,90년대에 교회 리더들은 제가 이런 새로운 리더십과 서구 사회에서 닥쳐온 잃어버린 표식인 교회의 이런 형태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게 되면 마치 제가 미쳤다는 듯이 바라봤습니다. 오늘날 더 많은 숫자의 목사와 교단 지도자들은 교인들의 수평이동은 되지만 매력적인 교회이지만 전혀 우리 문화가 변화되지 않고 있는 것에 각성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리더들이 뭔가 다른 것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교회 성장이라는 구식 패러다임을 만드는데 더욱 더 열심을 내게 되는데 그 또한 대부분 작동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근심 어리게 되었습니다. 서구 사회는 거대하고 구조적인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50년대에 만들어졌던 교회들, 그리고 6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졌던 교회들은 사람들과 점점 더 무관해지고 말았습니다. 교회들은 캐나다, 유럽 영국과 북미주 안에서 변화하는 세대에 대해서 급변하는 사회의 속성을 다룰 수도 없고 다루지도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서구 교회들이 처해 있는 미셔널 도전/과제들missional challenges의 전환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The Context of Mission in the West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미셔널 정황/상황missional context은 무엇입니까? 저는 현재 캐나다 뱅쿠버에 있는 태평양 북서부 연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 집은 산을 뒤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길 아래로 카필라노 강Capilano River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강은 그루즈 산Grouse Mountain 산자락에 있는 댐에서 흘러나오는 강입니다. 그 강은 아주 위험한 강입니다. 매년 그 강은 그 강물의 거센 힘을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지난 번 하루는 제가 아내 제인과 함께 그 강 곁에 난 산책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강은 잉글리쉬 베이English Bay로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폭우가 쏟아져 내린 후에) 우리가 다시 그 강둑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 강은 엄청난 속도로 포말을 이루고 으르렁대면서 내려가는 홍수였습니다. 그 변화가 급히 일어났습니다. 그 강은 기독교적 생활과 관련해서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서구인의 상상력을 형성시켜주었던 내러티브敍事들과 관련해서, 서구 사회 가운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비유입니다. “서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서구도 여러 서구가 있고 여러 모더니티(근대성)가 있습니다. 서구 사회속의 교회들의 미셔널 정황의 문제를 말하려면, 어쩔 수 없이 지나친 단순화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과 미국1)의 구분입니다. 이런 단순화를 하면서 또 하나의 있을 수 없는 일반화에 도매금으로 취급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모든 분들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a. The Missional Context - Europe/UK
유럽/영국의 미셔널 정황의 틀을 토론하기 위해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을 무찔렀던 워털루 전투the Battle of Waterloo에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인 1914년까지 유럽은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지냈습니다. 그 가운데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경제적으로와 군사력에서 성장했습니다. 이 시대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에 대한 진보와 경이로움의 주제들에 의해서 특징지어진 경제 및 사회 철학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서구 사회는 스스로를 치열한 진보의 행진의 최정상으로 보았으며, 그 가운데서 나머지 인류를 다 이끌어 나갈 선택 받은 인종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성직자들이 이런 사회적 계급구조 안에서 특권을 누리던 시기 가운데 서구 기독교를 형성시켰던 거만과 교만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은 ‘식민지들’에서 치러졌습니다. 한 무리의 유럽 국가들이 그 세계의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했으며, 기독교 선교 단체들은 군대의 안전한 보호 가운데서 지구상에 복음과 유럽식의 진보를 전파해 나갔습니다. 유럽은 평화와 번영의 성수기를 경험했습니다. 세계가 그들의 것처럼 보였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기독교적 생활 방식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진보와 인간 문명의 정상에서 하나님이 그들 편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 시기에서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기에 대한 바바라 터치먼Barbara Tuchman의 연구서 “8월의 대포들The Guns of August”에서나 이언 맥키언Ian McEwan의 소설 “속죄Atonement”에서, 그 두 저자는 각각 1914년의 길고 따스한 여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유럽은 약간의 유혈 사태가 자국민을 훨씬 더 강하게 만들며 진보와 기독교 선교의 전반적이며 거스를 수 없는 대세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그 태양의 따스한 온기에 푹 젖어 있었습니다. 그 댐이 무너지려고 하고 있으며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대서양에 의해 나누어져 있는 건너편 미국에서는 20세기의 대부분을 결정짓게 될 산업의 힘이 증대되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20세기는 미국의 세기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예외주의exceptionalism 의식을 통해서 형성되었습니다. 예외주의 의식이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국가로서 주로 기독교인 시민들을 위해서 독립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생활 방식을 형성해 온 나라라는 의식을 말합니다. 미국 남북 전쟁 이후 이 대양 저 대양에서 경쟁을 벌이는 한 나라가 생겨났으며, 새로 정착한 많은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한 나라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그들이 탈출해 나온 유럽보다 훨씬 더 축복 받았으며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서양 저편에서는 끊임없는 평화와 권력과 번영을 향해 움직여 나가는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유럽인들 가운데서 우려의 목소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 댐이 터져 버릴 지경이며 기독교적 생활과 더불어 서구 문명의 강물이 대격변의 급류에 휩쓸려버릴 것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화가들, 작가들, 극작가들,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왕과 여왕과 국가와 하나님만을 외치는 민족주의자의 소음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 댐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유럽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매우 끔찍한 세계 대전에 삼켜져 버렸습니다. 그 전쟁은 기계문명을 사용해서 그저 지형만 아니라 유럽의 상상력까지도 황폐화 시켰던 첫 전쟁이었습니다. 베르뎅 전투the Battle of Verdun, 1916 프랑스 북동부 뮤즈 강 곁의 요새 도시에서 불과 며칠 만에 75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왕가와 귀족 출신의 장군들을 위해 싸우다가 의미 없이 살육 당했습니다. 왕과 귀족들은 그들의 세계에 대해 전혀 접촉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가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교회 리더들과 기관들이 젊은이들을 강권하여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부질없는 대학살을 천명하면서 전쟁터로 나가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1차 세계대전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불신자들을 양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쟁에 나갔던 훌륭한 젊은이들이 침묵의 무신론자가 되어 귀향하는 기사를 읽는 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이들이 바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유럽의 미래 모습을 형성시킨 자들입니다.
1918년 그 전쟁이 끝났을 때, 유럽은 하나의 세계가 끝났다는 사실을 눈치 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위기의 깊이를 혹은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이해했던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2)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영국과 유럽의 기독교 리더들은 이 황폐화가 기독교 정체성과 관련하여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위기를 시정하고 기독교를 서구 사회의 중심으로 복귀시키는 일이 아직도 가능하다고 기대했습니다. 기독교 스토리를 문화의 중심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각난 파편들을 다시 붙여서 유럽을 과거 그 기독교적인 영광으로나 혹은 그 계몽주의 전통으로 되돌리는 일은 누구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교회들은 여전히 많고 목사들도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추억하는 나이든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여자들은 점점 늘어나서 교회를 채우는 반면 남자들은 집에나 머물며 침묵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세대에게 교회란 그저 출석은 하되 자신과는 더 이상 상관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유태계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했듯이, “벌어진 전통의 균열과 권위의 상실은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3) 기독교적인 내러티브(서사)가 아주 갑작스럽게 그리고 맹렬하게 세상을 휩쓸고 있는 의미와 정체성의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합니다. 기독교 리더들은 이 커다란 갈림길 시기에 옥스퍼드와 제네바와 같은 장소에 모여서 과연 그들이 그 상황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그것은 뭔가 취해야 할 각성적인 교훈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처없이 의미를 상실한 채 수동적으로 뒤로 물러나 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배가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천할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교회를 회복시킬 전략들을 짰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생활의 회복에 관한 책과 소책자들을 썼습니다. 그들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새로운 근육질적인muscular 기독교를 기렸습니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해외 선교에 헌신하는 움직임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에너지, 곧 컨퍼런스와 회의실에서 가진 온갖 대회들은, 유럽과 영국에서 기독교 스토리가 대체로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사실, 즉 그런 실제 병증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지나쳐 버렸습니다. 되돌아보건대 극소수 사람들만이 현실을 직시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리더들이 시계를 거꾸로 돌려 예전의 우리가 알았던 교회로 되돌아가려는 새로운 전략에 얼마나 부질없이 진력했는지 모릅니다. 거기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고, 교회됨의 새로운 방법을 배우는 게 필요하다고 자백하지 못한 리더십의 커다란 실패가 있었습니다.
1939년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은 그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서구라는 하나의 전통의 종국을 역설力說해 주었습니다. 교황 베네딕트Pope Benedict는 유럽 기독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묻습니다. 어째서 지난 1천 5백년 이상 기독교가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정수를 형성하고 있었던 그 유럽이 그 친 어머니를 그처럼 심하게 배격하게 되었는가? 베네딕트는 탁월한 신학자의 한 사람이며, 그는 그 스토리 가운데 살아왔던 한 사람의 유럽인입니다. 그는 결코 풋내기도 아니며 순진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의 관찰은 핵심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제 견해로는 기독교를 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기독교적 모델의 삶이 그다지 인상적unconvincing, 별로 납득할 만하지 않음이지 않기 때문입니다.”4) 유럽에서 형성된 기독교는 더 이상 사람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에게 확신을 줄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 기독교는 그 토대와 전통이 휩쓸려 가버린 시대 가운데서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낼 생활의 길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사생아인 계몽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합리적인 방법과 진리에 대한 제약적인 이해를 소유하고 있는 계몽주의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의 끔찍한 사건들은 더 이상 그 유산을 통해서는 기적의 치료제나, 심장 이식, 고화질 영화 이상을 넘어서는 제공할 것이 그다지 없다고 믿는 유럽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곳이 그 어떤 다른 지역이 아닌, 비판적인 포스트모던적으로 방향 선회가 발생했던 곳입니다.
b. The Missional Context - North America
미국은 기독교적 생활과 정체성의 면에서 복합적인 정황입니다. 지난 25년에 걸쳐서 종교 생활의 모양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기독교가 변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는 더 이상 단일 운동을 대변하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 전망을 가진 일련의 대화 그룹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으로 다양한 국가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시아의 여러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일과 마찬가지로 미 남부 지역에 있는 히스패닉들의 존재는 미국의 종교 지형을 여러 면에서 심원하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역동적인 종교 상황을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미셔널 정황에 대한 저의 언급을 현재 대다수의 미국을 이루고 있는 주류 미국인들아마 잠시만 더 지속될 것임. 즉 유럽에서 대규모로 이민 왔던 사람들의 후예들과 그 전통들 가운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만 제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바로 20세기 동안 미국의 종교적 정황을 형성했던 사람들이며 아울러 그들은 아직도 비주류들이 볼 때는 주도적인 종교 그룹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정황과 미국의 정황의 차이점은 그냥 한 마디로 서구적 정황이라고 말할 경우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은 두 대양대서양과 태평양의 보호를 받으면서 발전했습니다. 미국의 이민의 전통은 더 이상 그들을 원치 않았던 유럽을 뒤로 두고 떠난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럽은 그들에게 미래가 아니라 과거였습니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은 산업과 금융 그리고 군사의 면에서 거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환경입니다. 미국은 그 영향권과 상상력 가운데로 더욱 더 많은 것을 이끌어 들이고 있었던 새로운 태양이었습니다. 미국은 개인의 자유와 끝이 없는 변경, 확실한 숙명, 그리고 전 세계를 위해 하나님에게 특별히 선택된 산 위의 도성이 되어야 한다는 신기한 신정 사회적 확신으로 이루어진 건국 신화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20세기 유럽의 공포와는 동떨어져서 발전했습니다. 미국 기독교는 나머지 서구 세계와는 아주 다른 성공과 권력의 열기 가운데서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불가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미국은 그 자체를 전 세계를 비추는 횃불로 보았던 예외주의였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의 진리를 순수하고 새롭게 구현했습니다.5)이러한 특권적 지위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의식은 20세기 초엽 “크리스천 센츄리 Christian Century, 기독교 세기”6)라 이름 붙여진 새 기독교 잡지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이름을 가진 잡지는 1914년 이후에는 유럽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두 서구적 정황이 아주 다른 상황임을 잘 보여줍니다. 유럽에서 그 댐은 맹렬한 기세로 파괴되면서 황폐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댐들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전쟁에 나가서 세계를 구하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안전하고 안정된 자기 성 안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기독교적 생활은 작동했으며, 미국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곳이었습니다. 리더십, 교회와 선교 이슈들은 아주 주요하기 때문에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사무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몇 주 안에 찍은 베를린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습니다. 그 도시는 거의 돌무더기가 될 정도로 융단 폭격을 당했었습니다. 그 사진이 말하고 있는 스토리는 그런 베를린으로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되돌아왔던 한 젊은 엄마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그 엄마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났습니다. 그 이웃에서 소꿉장난을 하면서 자라났고, 사랑을 배웠고, 결혼하고 자녀를 갖게 되었으며, 전에 그의 부모님들이 그랬듯이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기 집이었던 자리의 폐허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자기가 어떤 정황 가운데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와는 대조적인 또 다른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똑같은 시기의 미국의 모습입니다. 그 풍경은 활기 찬 산업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은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들,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자동차가 있고 냉장고도 있으며 텔레비전 세트도 있는 성장하고 있는 교외지역으로 이사를 하고 있습니다. 월트 디즈니Walt Disney가 디즈니랜드를 생각하고 세웁니다. 이것이 바로 미셔널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두 개의 “서구 사회”입니다. 하나는 베를린이며, 다른 하나는 디즈니랜드입니다. 이 두 서구 사회는 기독교의 의미와 정체성에 대해 아주 다른 내러티브를 낳았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완전히 판이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정황은 동일시될 수도 없고, 한쪽으로 기울어서도 안 됩니다. 유럽의 대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내러티브와 그 모든 발전하는 다원주의와 다인종, 다종교적 복잡성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모더니티(근대성)들와 포스트모더니티(탈근대성)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들입니다. 하지만 미국적 대화는 다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공간상의 제약 때문에 거칠게 대략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몇몇 움직임들이 예를 들어 “복음과 우리 문화운동”Gospel & Our Culture Movement, 그리고 스탠리 하워바스Stanley Hauerwas 교수가 주도하는 소위 “에클레시아 프로젝트”The Ecclesia Project 운동과 미국과 그 시민 종교civil religion에 관해서 아주 중요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점을 인정하면서, 미국의 목회자들과 교회 리더들에게 제기되고 있는 지배적인 문제들은 교회 성장과 교회의 효율성에 대한 방법과 전략, 및 모델들에 대한 물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다시 복구하여 교회가 통하던 과거 시대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습니다. 미국 목회자들은 여전히 실용주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리더들에게는 변화하는 세계 가운데서 기독교 사명의 핵심적인 쟁점들은 교회가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더 나은 전술과 전략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유럽과 영국 교회에서의 상황은 점차적으로 기독교 리더들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을 물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면, 미국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그 쟁점들이 구도자들을 향해서 마케팅을 하는 새로운 전략들과 교회 성장을 돕는 참신한 방법들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감리교 안에서는 소위 “참신한 표현”Fresh E-pressions이라는 운동이 진취적으로 개발되어 새롭게 증거되고 있는 중입니다. 초점은, 지역교회에서 있는 평범한 (평신도) 남자와 여자가 이웃과 지역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이웃 안에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기대하는 바는 목회자가 주도하거나 하향적top down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략적 기획이나 사명선언도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발견할 수 있는 상향적bottom up 운동입니다. 예로, 리버풀같은 곳에서는 경찰 간부들이 일단의 행동하는 그리스도인 그룹을 조직하여 남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범죄 문제를 일리고자 교대 시간에도 미친 듯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렇게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들은 천편일률적인 전도 프로그램의 무거운 짐과 교회의 전략들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표현하는 법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아직 초창기입니다만 목회자들은 이제 이 일 가운데서 자신들의 역할을 익히려고 애쓰는 중이며, 저희는 교회에 단순히 무관심한 영국의 세속적인 대부분의 불신 이웃들 가운데서 성령께서 일하시는 강렬한 현장의 일면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영국 동부 지역의 작은 마을들에서는 오래된 가정 교회 운동이 폐쇄 직전의 성공회 교회들과 힘을 합치고 있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점은, 너무 많은 교회 리더들이 교회와 목회적 리더십에 대해서 영국과 유럽에서는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예전 교회로 돌아가려고 고쳐 보려는 미국으로부터 우리가 너무나 많은 단서들을 받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의 리더들은 성장 및 성공을 위한 방법과 관리와 전략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일종의 기능적 기독교 세계의 개가를 여전히 시도하고 있습니다. 대서양의 반대편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기능적 혹은 개념적인 기독교 세계는 끝장났으며, 모든 방법과 전략이 새로운 현실을 타개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향적인 인식에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정황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캐나다 사람으로서 제가 계속해서 놀라게 되는 점은 세계 다른 지역의 기독교 리더들이 기꺼이 미국식 대답과 모델을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세계 대부분의 다른 지역들은, 미국적 상황의 독특한 예외적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들과 거의 닮은 점이 없는 미국적 대답과 실용주의적 모델과 프로그램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통제 방법과 성공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성공처럼 보이는 것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속는지를 보여줍니다. 확실히 캐나다의 교회 리더들의 경우는 캐나다인이 된다는 것은 미국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쉽게 미국 교회 방식은 캐나다 교회의 방식이 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말하는 리더들과 교회들도 미국식 프로그램과 방법을 도입해서 과연 자기들도 캐나다에서 교회가 성공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캐나다는 미국적이기 보다는 훨씬 더 유럽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방법과 성공에 매료되고 속는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국과 유럽 정황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미국 교회에 관심을 돌려보겠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정황에 대한 이상의 논의와 관련해서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저서/작업으로 눈을 돌려 서구에서는 어떻게 미셔널 참여를 형성해 나가는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Lesslie Newbigin and Missional Context of the West
뉴비긴은 그의 책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Foolishness to the Greeks”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각 장들에서 내가 바라는 소기의 목적은 복음과 문화의 조우, 즉 복음과 유럽 및 북미주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 문화 및 그들의 식민지 및 문화적으로 파생된 가지들, 그리고 세계 여러 도시들 가운데서 늘어나고 있는 교육 받은 리더들의 무리에 의해서 형성된 문화 그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가 대개 “근대”라고 묘사하고 있는 그 문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진정으로 선교적인 조우에 어떤 점이 개입되어 있겠는가 하는 것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 “근대화”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그 현상, 대학교 및 기술 훈련 네트워크와 다국적 기업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서 제3 세계 대부분에서 진작되고 있는 그 현상은 사실상 서구 유럽인들 사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던 특정한 문화에 그 나라의 리더십이 흡수되는 것이다.7)
뉴비긴은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 1930년대 후반에 영국을 떠나 있다가 1960년대 후반에 은퇴하면서 영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영국에 되돌아와서 뉴비긴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남겨두고 갔던 기독교 영국이 사라져버린 그 심각한 정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유럽에서의 기독교의 위태위태한 상태에 대해 “1984년의 반대편The Other Side of 1984”이라는 소책자를 썼습니다. 그 질문은 ‘복음과 후기 근대 사이의 선교적 대응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중적인 사회 변화와 주도적였던 교회의 쇠퇴를 직면한 목회자와 교회 리더들에게 뉴비긴이 어떻게 이 질문을 제기하는지 그 방식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 자신의 문화권 가운데서 일종의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목회자이자 신학자로 지낸 30년 동안 그가 썼던 세 권의 책에 대해 간략하게 코멘트를 하겠습니다. 그 세 권의 책은 “다 아는 비밀Open Secret”,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 및 “다원주의 사회 가운데서의 복음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입니다. “다 아는 비밀”은 성경 신학을 가르치기 위한 훈련 교재로 씌어졌습니다. 그 주장은 하나님께서 선교사라는 것입니다. 그 주제는 세상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 바탕에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교회의 사명(선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핵심으로서 선택이라는 최고의 개념이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그것은 한결같으며 예리한 통찰로 기독교 전통과 성경의 전망으로부터 계몽주의 상상력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1989)은 다원주의 사회 가운데에서 복음이 맞서 싸워야만 하는 핵심적인 도전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각 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는 너무나도 놓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현재 북미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셔널 대화missional conversation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먼저 긍정적인 점을 지적하고 그 다음에 부정적인 점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30년 이상 동안 그가 쓴 모든 글에서의 뉴비긴의 초점은 복음이 어떻게 근대 서구 사회의 문화에 들어가 응전을 하느냐 하는 문제와의 지속적인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서구 사회와의 선교적 조우의 성격에 대해 질문을 할 때에 그 질문에는 언제나 이러 저런 형태로 복음과 모더니티근대성과의 교전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그가 영국으로 귀환한 뒤부터 죽기까지 쓴 뉴비긴의 글 가운데에서, 그의 관심이나 문제의식의 초점은 교회가 아닙니다. 뉴비긴의 작업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의 미셔널 질문missional question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점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질문들은 복음과 여러 형태를 띠고 있는 모더니티근대와의 미셔널 대처의 문제에 대해 부차적이며, 차후의 문제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직관적인 생각과는 반대가 되는 것처럼 들리고 성경적 상상력에 충실하지 않은 것처럼 들려서 우리 귀에 낯설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뉴비긴의 글쓰기의 초점도, 목표도, 목적도, 주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교회를 서구 문화의 선교적 대처 문제의 일차적인 자리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미셔널 대화의 성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가 왜 이런 식으로 제 말의 요점을 제시할까요? 제 말은 뉴비긴에게 있어서 교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의 상상력을 발휘했던 문젯거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뉴비긴은 우리들 대부분이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갖고 있는 미셔널 태도의 모델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교회는 하나님의 활동의 초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게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교회에 대한 질문들을 가지고 출발해서는 교회와 그 리더십의 문제를 제기할 수도 타개해 나갈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문제에 대한 답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행복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어떤 것의 산물입니다. 행복의 특성들을 미리 규정한 다음에 그 특성들을 찾고자 함으로써 행복에 이르는 먼 길에 오르지 않듯이, 미셔널 교회가 무엇이냐를 직접 찾기 시작해서는 그러한 교회의 등장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자신만을 바라봐서는 결코 자신을 발견할 수 없듯이,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서구 사회 가운데서 미셔널 삶을 개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뉴비긴은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습니다.
Naming the Issue in the Western Context(s)
서구 사회의 미셔널 정황의 문제에서, 콜린 그린 박사Dr. Colin Greene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지난 20년간을 간단히 훑어본다 할지라도 현대교회가 주로 통상적인 접근 방법으로써 비즈니스적 접근 방법으로 복귀하면서 뉴비긴의 아젠다agenda에서 벗어났음이 명확해진다. 그 결과 교회들이 이 최우선적인 선교학적 현실에 직면해서 더욱 더 무능해지고 절망적이 되어 버렸다. 우리에게 대한 도전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황은 극적으로 바뀌어 버렸다.”8) 북미주에서 뉴비긴의 아젠다와 중심적인 문제는 교회의 효율성과 교회 성장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 버렸다고 봅니다. 20세기의 마지막 몇 십 년 동안 서구 사회에 대한 미셔널 도전/과제missional challenge을 형성시켜주면서 사용했던 그의 창의적인 상상력은 거의 다 제켜져 버렸고, 그 대신에 교회를 고치고 회복시키고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법들을 추구하는 길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물론 지금은 미셔널 언어missional language가 사방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컨퍼런스와 웹사이트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유행어’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미셔널 언어가 관리와 예견성 및 결과에 대한 통제를 가리키는 새로운 말로 다시 채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미주에서 뉴비긴의 아젠다는 다시금 또 다른 형태의 실용주의로 복귀해버렸습니다. 책마다, 컨퍼런스마다, 미셔널missional이라는 말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교회 성장과 건강한 교회 모델로 복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작동할 수 있게 하느냐 하는 방법론을 묻는데 집중하고 있는 기능적 기독교 세계에 대한 편만한 예속성입니다. 미국 교회의 기독교적인 생활 저변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교회를 떠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한편에서는 교회의 건강과 구도자 지향적 방법에 대한 북미적 초점에 대한 불만과 배격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기독교 내러티브의 전부라고 한다면,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과 복음이 한 사람의 삶이 제대로 운영되도록 도움을 주는 문제에 대한 것이라면, 윈프리 오프라Winfrey Ophra나 톨런드 에커드Eckert Tolle나 닥터 필Dr. Phil이 교회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 리더들은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우려 때문에 교회 건강과 교회 성장 모델을 새로운 미셔널 포장지로 재포장해서 상황을 호전시키고자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미주에서의 미셔널 전환은 이 순간에도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 교회는 여전히 올바른 방법과 전략만 갖는다면 원하는 미래를 예견할 수도 관리할 수도 있다고 약속하는 모더니티근대성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많은 리더들에게 그 미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는 대형 교회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문화가 진행해나가고 있는 방향이 아닙니다. 북미주 교회의 미셔널 미래는 큰 구도자 (지향) 교회들 가운데서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뉴비긴의 아젠다에 참신하게 동참할 수 있는 필요성이 무엇인지는 즉 어떻게 복음을 그들이 보냄 받은 서구적 상황 안으로 연계시키며 들어갈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인도에서의 뉴비긴의 모습들을 보는 것은 참 매력적입니다. 그가 현지 언어를 배우려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있는 모습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 가운데 들어가서 그들과 접촉하시는지를 알아보고자 뉴비긴이 자주 현지인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묻고 하는 모습이 더 많습니다. 이것은 서구에서 지역교회 리더들의 사역이 되는 데도 필요한 일입니다. 북미주에서 목회자와 교단의 리더들이 자기 이웃들과 아주 적은 관계만을 갖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교회 프로그램들과 각종 모임에 단단히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 한 분이 12년 동안 살았던 이웃과 단 한번도 접촉이 없었던 고로 자기 교회 교인에게 자기를 좀 이웃들에게 소개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 목사님이 발견한 것은 자기 옆집에 사는 80대 노파가 3개월 전에 자기 남편을 잃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옆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자석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대형 센터같은 개념의 교회와 기본적으로 연료가 바닥난 큰 단체를 운영했던 목사님들은 조금 압니다. 떠오르는 세대는 이런 종류의 교회에 관심이 없으며 전혀 관계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아주 다른 이해도 필요하고,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다르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룹과 함께 앉아서 그들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배경과 직업 출신 사람들로 구성된 한 그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목사님 부부를 포함하여 그들 각자가 자기 교회까지 운전해오는 10분에서 30분 동안 자기 이웃들을 그냥 계속해서 지나치기만 하고 단 한번도 그 지역민들과 접촉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일련의 이유들로 인하여 그들은 매주 1회에서 2회 정도의 식사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교회들이 가르쳐왔던 전도의 전략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교회와 관련하여 어떤 환경도 갖지 않았던 대다수 사람들과 접촉할 유일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그들의 확신이 자라난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몇몇 거리에 걸쳐 점점 늘어나는 가정 교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의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그는 교외에 있는 큰 복음주의 교회의 당회원이었고, 그의 생활은 다자란 자기의 자녀들만 겨우 아는 정도의 이웃들과의 모임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짐은 그 도로를 건너기로 작정하고 과부댁의 잔디 깍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건대, 이것 역시 교회의 전도 과정에서 나온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 이웃과 접촉하려는 그의 자연적인 욕구였습니다. 그는 몇 달이 안돼 그 도로변 몇 곳의 잔디와 이웃집의 잔디를 깍고 있었는데, 이웃들이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으러 나왔답니다. 그도 모르는 새에 벌써 그들은 먼저 커피를 들고 그의 집에 모여서 자기들의 삶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의도는 하지 않았지만 개척교회를 시작할 만한 상황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 가운데 차를 타고 20분이나 걸리는 교회에 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짐은 알았습니다. 이웃 사이에는 이미 내면으로부터 뭔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매력적인 것은 대부분의 이런 전환들이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이며 결코 목회자들에 이끌려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대한 전환기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영국과 유럽의 상황은 다릅니다. 분명히 북미로부터 실마리를 얻고, 교회를 고치는 방법을 찾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들의 리더들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유럽과 영국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이런 참신한 기독교적 삶의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미셔널 삶missional life에 대한 이러한 표현들은 영국 성공회와 같은 몇몇 오래된 교단의 교회들로부터 떠오르고 있으며, 교회 집단들 가운데서 동역하기 위해서 순수한 동기로 울타리를 넘어서는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레함 크레이감독Bishop Graham Cray은 모든 “참신한 표현 Fresh E-pression”으로 불리는 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들의 홈페이지역자 주 www.freshe-pressions.org.uk를 한번 방문하면 지역교회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이웃들과 지역으로 되돌아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며 그들이 어떻게 동참하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 목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러한 성령님의 에너지와 생명이 약동하는 현장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전략을 시행하거나 대담한 목표를 들고 나오는 목회자와 교회 당회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평범한 남녀들이 자기 지역 가운데서 시도하는 작은 실험들에서 비롯됩니다. 영국의 이 운동의 흥미로운 요소는 안수받은 성직자들의 역할 특히 그들의 신학훈련의 본질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미셔널 삶의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실험들은 아직은 푸른 새싹들에 불과하지만, 놀라운 소망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실험입니다. 점점 교회 리더들이 교회 성장과 교회 건강이라는 게임이 과도하게 세속적이며 다원주의적인 유럽에 대처하지 못할 것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생활과 증거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이제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상당히 소망적인 출발입니다.
Implications for Leadership
서구의 이 새로운 정황에서 목회 리더십을 위한 몇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코멘트를 북미주에 제한시키고자 합니다. 북미가 제가 가장 익숙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 코멘트는 매우 간략합니다. 그리고 그 함축적인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자체로 완전한 논문이 필요한 내용들입니다만 간단히 요약합니다.
1. 북미주에서 리더십 형성의 정황은 여전히 신학교입니다. 급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는 교회 형태들을 가지고서 신학교가 지금도 여전히 리더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교회의 내면 세계 가운데에서 여전히 리더십의 중심에 위치한 이런 지배적인 모델들은 설교와 교육 및 목회 사역의 다른 기능들의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리더는 일반적으로 교회에 찾아오는 자들에게 종교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파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기의 지배적인 메타포는 교회라는 것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즉 교회는 어떤 종류의 서비스를 얻기 위해서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구 사회의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 진정 미셔널로 동참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리더십 모델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개발할 만한 대안적 실험들이 있습니다. 몇몇 도시에서 저희는 목회자 기본과정을 개발하여 그들이 자기 이웃과 지역과 연계된 교회를 형성하는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들이 시작할 때, 대부분 목회자들은 몹시 불안해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교회 밖의 일을 예전에는 많이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놀라움은 그들이 지역사회에 되돌아가기 위한 기술을 배울 때와, 거기로부터, 비록 쇼핑몰이 종교적 선행과 봉사를 잔뜩 제공하더라도 그보다 훨씬 나은 선교기관으로서 지역교회를 어떻게 형성할지 그 방법을 배우게 될 때 그들이 얼마나 에너지가 넘치게 되는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위의 모델에 대한 대안적 모델로 제시된 것은 기업가적인 리더CEO형의 모델입니다. 교회 위기의 대처할 해결책은 비전을 창조할 수 있고 교회를 자라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전략을 산출해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비록 그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이것이 북미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리더십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차용하여,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그 활용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들먹이면서 무비판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영웅적 리더 모델입니다. 그러나 리더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어떠한 종류의 성경적인 상상력에서부터도 가장 먼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리더십은 강력하게 보이고,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이지만,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닫아버리고,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서 창발하게 될 하나님의 상상력의 미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위축시켜 버립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입니까? 목회자들과 다른 리더들이 북미주의 미셔널 정황에 접근할 수 있는 참신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 동안 대안적 형태에 대해서는 폭 넓게 글을 써왔습니다. 그래서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현재 서구의 교회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공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전에 와 본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전에 이미 안다고 가정하는 이러십 모델은 완전히 바뀐 시대적 환경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일하심the mission of God을 오도할 뿐입니다. 그럼 어떤 일들이 제기될까요?
1. 우리는 먼저 리더십의 우선적인 활동과 사역의 촛점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리더십 형성을 위한 우리의 가장 기본 모델은 기독교 세계를 가르쳐온 정체된 한 성직자의 종교개혁같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누가복음 10:1~12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거품이 되어 버린 교회의 담벼락 바깥으로 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웃과 지역 사회로 들어갈 때에만 하나님이 앞으로 행하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이며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주머니baggage를 가지지 않고 가서 섬기는 종으로서의 겸비한 사역입니다. 이것은 새롭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기 위해서 기꺼이 낯선 객, 타자가 될 각오가 되어 있는 자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시작되고 있는 많은 장소들을 알고 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쉐인 클리어본역자 주: Shane Clearborne의 책 Irresistible Revolution, Zondervan을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로 규장 출간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 살면서 새로운 수도원 생활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애틀의 카렌 워드는 루터교 목사로서 교회 주변의 이웃들에게로 이사하여 커피점을 차려서 그곳에서 봉사하며 지역민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크리스 어드만은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시무하는 장로교 목사인데, 영적 실천을 배우는 기간으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지역 공동체로 들어가는 교회의 순수한 운동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파사데나에 사는 마크 라우 브랜슨 교수와 그의 가족은 죽어가는 일본계 교회의 한 일원이 되었습니다. 온갖 교회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 대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려 애쓰고 있습니다. 마크와 그의 아내 니나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를 시작하면서 거리의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미치는 이런 영향은 놀라웠습니다. 마크와 니나는 목사가 아니지만, 마크와 저는 풀러신학교에서 함께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소망스런 이야기가 무척 많습니다.
2. 리더는 지역민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의 장래의 중심임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리더들이 세상을 생각하고 알아가는 방법의 전환에 대한 것입니다. 북미주에서는 리더십이 항상 모든 곳에 적용될 수 있는 거대한 이념과 보편적인 원리들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역성과 평범한 것의 힘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장래가 우리의 일반화와 이념들로부터가 아니라 이러한 지역으로부터 창발emerge, 등장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왜 많은 젊은 리더(목회 지원자)들이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생소한 곳에 가서 3년간 신학훈련을 받은 후 자기가 파송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고 훈련을 받고 있는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첨단기술은 기존의 신학교들을 더 이상 유용성이 없게 하는 사고방식의 교육센터로 만들기 시작할 것입니다인터넷의 활성화를 통해 기존 신학교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말임.. 어느 경험 많은 리더가 대형 종교기관에 대해 언급한대로, 신학교의 붕괴/쇠퇴는 불과 20여 년 정도 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안수를 받기 위해서 거쳐야 되는 많은 장애물 목록을 만든 교단들은 이미 화석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훈련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신학교가 쓸 데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커다란 격변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훈련 모델들이 미셔널 필요에 따른 지도자 형성에 부적절하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3. 우리 자신은 신학적 상상력의 형성자들이 되기 위해서 지역 사회 안으로 들어가는 지역 신학자들local theologians로서 리더의 소양과 소명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4. 계획이나 전략, 비전이나 미션(사명) 선언문의 가져다주는 개념은 미래를 보장해주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공동체들을 형성하고 있는 보통 남녀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끄집어내는 리더들은 반드시 정원사(과수원지기)나 산파 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리더들에게 있어서는 정체성에서의 급격한 변화가 되겠습니다만, 전적으로 필수적인 일입니다. 큰 비전들을 가진 대단한 전략가들과 영웅적인 리더들이 아니라, 옛날 수도원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영적으로 지도해주는 수도원장의 역할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통 불확실하며 거대한 변화의 시기 가운데서 기독교적인 실천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시행착오를 거쳐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서 서서히 잉태시켜 주시는 미래를 그 공동체가 발견하게 될 것임을 인식하면서 기독교적 삶의 실천 가운데서 사람들을 독려하고 형성시켜주었던 리더였던 것입니다. 영국의 노쓰썸브리아Northumbria 공동체 같은 곳은 이렇게 하면서 침례교 목사님이 자기들의 소명을 알아갔던 방법을 재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있습니다. 북미주에서 리더십 개발을 위해 확립된 패러다임은 이제 소진되었습니다. 신학교와 교단들이 우리가 이런 전환에 대해 이해하고 적응하려고 몸부림치며 리더십 형성에 새로운 실험들을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많은 저항들도 있지만 이런 많은 전환의 중심에, 또한 목사들만이 우리들의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 이상의 색다른 감각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문화들 가운데서 선교사로 보내질 남녀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영적 지도자였던 고대 수도원장처럼 되어야 하는 남녀입니다. 이 남자와 여자들은 이웃 속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 전 덴버에서 저는 교회의 성도들은 점점 늙어가고 있었고,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렸던 교외에 위치한 한 교회의 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오랜 세월 동안 장로교인으로 살아왔던 몇명 성도들이 어떻게 담 너머로 손을 뻗어 이웃과 접촉하려 하는 지를 설명했습니다. 아이다호의 이글 지역에서 저는 소수의 성도들이 마을 공동체가 아닌 교회 공동체에 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하나님께 이웃을 위해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을 보았습니다. 5년 후에 그들은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 된 까페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지역 청소년과 연계하여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마을 센터를 세웠습니다. 100년 전, 웨일즈에서 불어온 거대한 부흥의 물결로 새롭게 된 영국의 교회들은 오랜 세월 동안 황량한 사막과도 같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 목회자가 새롭게 합류한 모임에 있던 다른 목회자에게 지난 6개월간 그들의 교회에서 얼마나 자주 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물었습니다. 대답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계속 물었습니다. 지난 5년간 그 교회에서 대화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께 간구하고 그들의 이웃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두 주 전에 나의 소중한 친구 마틴 로빈슨은 제게 그 작은 마을에 있는 교회들이 지난 3개월 동안 열두 번 이상의 대화를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유럽에서 교회는 죽었다고 선포했지만 영국에서는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했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남자와 여자가 교회 담장 밖으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의 이웃과 공동체를 향해 돌아가면서 교회는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2009.6.15.KACP자료)
- 2011/04/20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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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징 예배에선 촛불과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통해 보다 더 영적인 환경이 조성된다. ⓒ김진영 기자 |
어느 예배의 풍경을 상상하며 그린 것인데, 혹 가톨릭의 미사가 아닌가 할지 모르겠다. 촛불과 스테인드 글라스 등 주로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최근 미국에서 점차 그 저변을 확대하고 있는, 일명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머징 예배는 그 이름 자체로 고유명사가 아닌,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예배의 형식을 ‘떠오른다’는 뜻의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주로 경제학에서 미국과 서유럽의 선진국 시장에 이은 중국과 한국 등 신흥 시장을 일컬어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경우다.
이머징 예배는 미국에서 흔히 ‘구도자 중심 이후의 예배’(Post Seeker-sensitive Worship)로 불린다. 말 그대로 미국과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이 비신자 전도를 위해 도입한 ‘구도자 예배’의 대안으로 제시된 예배라는 뜻이다. 미국의 윌로우크릭교회와 새들백교회 등이 도입한 구도자 예배가 서서히 그 한계점을 드러내면서 새롭게 대두된 예배가 바로 이머징 예배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구도자 예배의 대안을 찾게 된 걸까. 이는 구도자 예배가 지향하는 대상과 깊이 연관돼 있다. 이 예배는 대개 교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베이비 부머’(Baby Boomer)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은 교회가 고리타분하고 따분하며 현실과 무관한 종교적 의식만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는 세대들이다. 그래서 교회는 될수록 종교적 의식을 생략하고 현대적 감각의 시청각 영상과 음악을 사용하는 구도자 예배를 통해 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베이비 부머 다음의 세대, 곧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달랐다. 이들은 해체주의와 상대주의, 이질성과 다양성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모던’(Post Modern)에 영향받은 세대들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상호 의존적이며 진리와 가치를 머리로 학습하기보다 가슴과 행동으로 체험하길 원한다. 모든 것이 청중의 ‘편의’라는 차원에서 기획되고 진행되는 구도자 예배는 결정적으로 이들 젊은 세대들에게 ‘체험’의 공간을 마련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머징 예배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영적 체험’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속한 젊은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아는 것보다 스스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끼고 싶어한다는 발견이 이머징 예배로 이어졌다. 경건한 분위기를 선호하고 예전과 영성 훈련 등에 보다 더 관심을 두는 젊은이들은 더 이상 구도자 예배에 만족하지 않았다.
결국 구도자 예배를 위해 십자가를 비롯한 기독교적 상징들을 모두 걷어냈던 교회들이 다시 전통적 모습을 찾기에 이르렀다. 촛불을 사용하거나 구약의 예배에 등장한 향을 피우고, 스테인드 글라스를 활용해 시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극장과 콘서트홀로 변해간 예배당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경건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현대 문화의 색깔을 빠른 속도로 덧칠해간 교회가 다시금 전통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셈이다.
또 하나 이머징 예배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형식의 파괴’다. 이머징 예배는 즉흥적 체험과 영적 신비감을 강조해 예배의 특정한 형식에 예배자가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예배자는 기도와 찬송 등 신앙적 행동을 미리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이머징 예배, 한국서도 곧 나타날 것
이머징 예배는 현재 미국에서 상당할 정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며 또 하나의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에서 목회하며 최근 「이머징 교회와 신비주의」(부흥과개혁사)를 번역한 황스데반 목사는 “현재 미국에 미치는 이머징 교회 운동의 영향은 대단하다”며 “복음주의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 이머징 교회 운동을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이미 2천만 명 이상의 미국 교인들이 이머징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지난 2006년 한 방송사의 조사 결과 나타났다. 따라서 지금은 그 숫자가 훨씬 더 클 것이라는 게 황 목사의 추측이다. 뿐만 아니라 이머징 교회의 리더 중 한 명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인에 선정된 바 있다.
황 목사는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뜻을 같이 하는 인물은 릭 워렌, 리차드 포스터, 척 콜슨, 토니 존스, 토니 캠폴로, 댄 킴벌, 로브 벨, 패짓 더그, 보르그 마르커스, 존스 앨런 등 미국 사회와 교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며 “앞으로 이들이 이 세대에 어마어마한 변화와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아직 이머징 예배의 뚜렷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도입된 구도자 예배가 얼마 후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 점을 감안하면 이머징 예배 역시 머지않아 국내에서 그 영향력을 점차 확대할 것이라는 게 다수 신학자들의 전망이다.
“잘못된 은혜지상주의” VS “다음 세대 위한 예배”
그러나 이머징 예배를 보는 시각은 서로 엇갈렸다. 황스데반 목사는 “이머징 교회 운동의 신학은 절대 진리를 거부한다. 상대주의와 인본주의가 그 운동의 본질이기 때문”이라며 “이머징 예배가 확산되면 그 어떤 절대적 진리를 강하게 외치는 일들이 힘들어질 것이다. 그보다는 포스트 모던 사상에 물든 교회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가장 즐겁게 예배를 드리는 때가 올 것”이라고 이머징 예배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황 목사는 또 “한국에서도 이머징 교회 운동이 그대로 나타날 것”이라며 “이머징 교회와 관련된 책들은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사는 일반인들에게 거부감이 없이 읽혀질 것이 확실하다. 이머징 교회 운동이 한국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때는 단지 그 때가 언제이냐 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한국교회가 이머징 예배를 경계해야 함을 역설했다.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이 교수는 “과거 경배와 찬양 운동이나 구도자 예배가 그랬듯 앞으로 이머징 예배 역시 일종의 혼합된 양상으로 국내 많은 교회들이 받아들일 것”이라며 “성경적이 되려는 의식없이 그저 유행을 좇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신앙의 선배들이 왜 피를 흘리며 성경적 예배의 모습을 끝까지 지키려 했는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머징 예배에선 종교개혁적 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교회는 종교개혁적 전통 속에 있어야 한다”고 이머징 예배를 비판했다.
이어 이 교수는 “(이머징 예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은혜지상주의 때문”이라며 “어떤 방식이든 은혜만 되면 된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은혜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반대로 배본철 교수(성결대)는 “긍정적으로 본다. 이머징 예배가 시작된 동기 자체가 구도자 예배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것이었으므로 분명 한국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운동이든 처음 시작될 때는 유행처럼 번지면서 부작용이 발견된다. 어미징 예배도 ‘이머징 주의’가 되면 또 하나의 폐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이머징 예배의 좋은 점들을 잘 발견해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배 교수는 이머징 예배가 촛불이나 십자가 등 조형적 상징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 “하나의 교육적 차원의 것이지 그것 자체로 형상화나 우상화는 아니다”며 “상징들을 통해 표현하려는 은총을 신자들에게 잘 적용시켜 준다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 교수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예배의 본질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이 변화의 동기가 돼야 한다”며 “모든 것은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는 차원에서만 적용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승중 교수(장신대)도 이머징 예배에 긍정적 견해를 나타냈다. 주 교수는 “앞으로 더욱 주의 깊게 이머징 교회들과 그 예배의 흐름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21세기 포스트 모던 사회에 접한 한국교회 예배가 나아갈 한 가지 방향성을 짐작하게 된다”며 “포스트 모던 시대를 맞이한 교회들은 내심 커다란 위기의식 가운데 있다. 기존의 진리체계가 해체되고 상대화 되며, 모든 권위와 전통이 부정되는 상황 속에서 기존 교회들은 당황하고 있다. 이머징 예배는 예배 현장의 혼돈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던져 주는 시사점이 크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이머징 예배는 교회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력 아래서 어떤 미래적인 교회를 세워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 대상은 주로 젊은 세대에 맞춰져 있다”며 “이 세대는 자기중심적이고 개성이 뚜렷하며,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에 아주 익숙하다. 그러므로 이머징 예배는 다음 세대 부흥을 위한 예배를 고민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예배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 2011/04/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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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현실 참여”를 주제로 세 차례에 걸쳐 열린 장신대 소망신학포럼. |
김도훈 교수는 “하나님 나라, 삶, 문화 : 이머징 교회의 일상신학과 일상실천”이란 주제로 강연을 전했다. 이머징 교회 운동은 미국과 영국,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 전문신학자들이 아닌 일선의 목회자들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는, 포스트모던 문화 시대의 교회운동이다. 김 교수는 ‘이머징 교회’에 대해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 변혁적 공동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닮아가는 선교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이머징 교회는 주일만이 아닌 평일의 일상(everyday)적인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로서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머징 교회의 신학과 실천을 평가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하면서 먼저 “이머징 교회는 교회가 문화와 함께 가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줬다”고 말하고, “이머징 교회가 이 시대의 변화, 특히 젊은 세대들의 생각과 문화의 변화를 읽어 냈다는 것을 장점으로 본다면, 한국교회는 앞으로의 미래 교회를 만들어 가는데 이머징 교회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또 김 교수는 “이머징 교회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있어서 문화를 긍정했다는 점에서, 복음과 문화의 대립이 아닌 성육신적 관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오늘 이 시대에 적절한 시도”라고 말하고, “문화 선교, 다시 말해 문화를 향한 선교, 문화 속에서의 선교, 문화를 도구로 한 선교, 이 모든 선교는 한국교회에 매우 필요한 시도”라고 전했다.
특별히 그는 “과거 종교개혁자들은 그 당시 상황과 문화 속에서 ‘성육신적 문화 참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설명하고,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당시의 최첨단 인쇄기술을 사용해 종교개혁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며 “오늘의 시대에 문화를 창조적, 변혁적으로 수용하자는 이머징 교회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적 종교개혁일 것이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머징 교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우리의 문화 속에, 일상의 삶 속에 그리고 지금 성취도 있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한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이머징 교회의 강조점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미래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미래적 하나님 나라만을 강조하는 미국 복음주의 컨텍스트를 고려한다면 그들의 주장이 이해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하고, “일상의 삶은 ‘성례전’이어야 한다”는 이머징 교회의 이해를 설명하면서 한국교회가 이러한 ‘성례전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쇠퇴해가는 교회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회를 싫어하고, 현재의 포스트모던 문화에 물들어 있는, 포스트모던 탈기독교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이머징 교회이다”고 말하고, “이머징 교회 운동을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비판하기 전에 미래 교회 운명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며, 삶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을 먼저 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오늘의 여러 상황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회개를 통해 새로운 교회운동이 등장하기를 소망한다”며 강연을 마무리 했다.
둘째 강연을 전한 이승갑 초빙교수는 “하나님의 나라와 기독교인의 삶 – 관계와 책임 : 과정사상에 따른 현실세계 안에서의 더욱 책임적인 삶을 위한 신학적 제언”이란 주제로 발표하면서, “책임적인 영성의 기독교인들만이 변화하는 세계를 위한 또한 세계를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님과의 공동창조 안에서 함께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협력하는 자일 수 있다”고 전했다.
마지막 셋째 강연은 박성규 박사가 “하나님의 나라와 기독교인의 삶 : 기도, 열정, 저항으로써의 그리스도인의 삶 – 칼 바르트의 화해론의 윤리를 중심으로”란 주제로 전했다.
한편 논찬은 장신근 교수(장신대 기독교교육학)와 정홍렬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조직신학)가 맡아 전했다. 소망신학포럼은 21세기 장신대가 지향해야 할 신학의 정체성을 점검해 확인하고, 21세기에 대두되고 또 대두될 수 있는 제반 문제들에 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신학적 과제들을 연구해 문제 해결의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신학이 교회와 사회에 봉사토록 하려는 목적을 갖고 소망교회(담임 김지철)에서 장신대와 협력관계를 구축해 후원하는 사업이다.
기사제공=아폴로기아(http://www.apologia.co.kr/
- 2011/04/2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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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중심의 ‘구도자 예배’가 오히려 청년 내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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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 예배에 대한 대안으로 ‘이머징 예배’를 제안한 조성돈 교수의 말에 참석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 김진영 기자 |
“교회는 ‘구도자 예배’라는 것으로 열심히 젊은이들의 취향을 쫓아갔다. 그런데 지금 결과는 어떠한가. 그래서 젊은이들이 교회에 남게 되었는가?”
‘경배와 찬양’으로 대변되는 한국교회의 구도자 예배(seeker worship)가 더이상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성돈 교수는 4월 30일 오후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담임 최이우 목사)에서 열린 목회와신학연구소 공개세미나를 통해 교회 예배의 변화를 촉구했다.
‘현대인의 종교성과 이머징 문화’를 제목으로 발표한 조 교수는 미국에서 ‘이머징 교회 운동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목회자 댄 킴볼의 말을 인용하면서 “구도자 중심의 예배는 구시대적이며, 오히려 교회에서 청년들을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훌륭한 사운드가 뒷받침되고 많은 무리의 찬양인도단이 등장하는 청년 중심의 예배를 강화하는 것에서 목회의 돌파구를 찾고 있다. 예배실은 밝은 조명으로 채워지고 이전에 있었던 강단의 휘장이나 커튼들은 사라졌다. 예배실 전면에서 십자가와 같은 상징들이 현대적 인테리어와 스크린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 도구들로 대채됐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은 이러한 구도자 중심 예배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게 조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이전 세대들은 교회에 흥미를 잃어 떠났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들에게 흥미를 느끼게 해야 했다. 이것이 구도자 예배”라며 “지금의 세대는 기독교를 접해보지 못한 세대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우 영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 이전 세대에 통했던 흥미위주의 전략은 이들에게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쇼로 전락한 현실 반성한, ‘이머징 예배’가 대안”
전통 예전의 회복: 삶과 진리, 거룩, 영성, 절대성
조 교수는 이러한 세대들을 새롭게 떠오르는 세대라는 뜻의 ‘이머징 세대’(emerging generation)로 규정하고 이들을 위한 예배로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를 제안했다.
이머징 예배는 오늘날 예배가 하나의 공연이나 쇼가 된 것, 예배자들이 예배의 주체가 아닌 하나의 관객으로 전락한 것을 반성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예배는 짜여진 틀에 얽매이지 않고 유기적인 흐름에 따라 움직이며 신비감이 우러나올 수 있는 분위기를 창출한다. 기도처소, 미술처소, 작문처소와 같이 성도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된다.
무엇보다 이머징 예배는 고전적 가치들과 전통적 예전으로의 회복, 곧 구도자 예배에 밀려 그 자리를 잃어버린 삶과 진리, 거룩, 영성, 절대성 등을 그 핵심 가치로 삼는다.
조 교수는 “이것은 이전 교회들이 구도자들을 위해 기도교적 상징들을 숨겨놓았던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라며 “이머징 예배에서는 십자가를 보며 예배의 초점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천주교 신자는 늘지만 개신교 신자는 줄고 있다. 그 동안 구도자 예배가 절정에 달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교인 수 감소는 아이러니”라며 “현대인들은 종교를 선택함에 있어 더이상 재미와 흥미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룩함과 상징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선택한다. 개신교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읽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조 교수는 “이제 한국교회도 구도자 이후의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그것은 전통의 회복이고 동시에 거룩의 복귀”라며 “이머징 예배를 하나의 대안이라는 전제에서 주일예배를 제외한 시간에 실험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영적 경험을 바라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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